궁금한 지식

궁금증의 시작: 그날의 역사 미스터리

두유밍 2024. 1. 20.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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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궁금증은 그날의 역사 미스터리입니다.

역사 교과서에서는 알려주지 않는 역사 속 기묘한 미스터리 사건들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인류 문명은 각종 기록과 유물 등을 통해 과거를 증명하고 또 방대한 역사를 쌓아왔는데요. 하지만 아직도 해명되지 않은 미스터리한 사건들이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의 충격적 기록부터 세계 불사가 의한 사건들, 그리고 의문의 고대 미스터리까지 전부 파헤쳐보겠습니다.  만약에 이 미스터리한 사건의 열쇠를 찾는다면 인류의 역사는 새로 쓰일지도 모릅니다.

그날의 역사 미스터리 설명
그날의 역사 미스터리

역사 미스터리

  • 문무왕릉비에 담긴 숨겨진 비밀

신라 제30대 왕으로 676년 삼국 통일을 이룩한 통일 국가의 틀을 세운 문무대왕. 그런데 행방이 묘연했던 문무왕릉비의 하단 부분을 1961년 경주의 한 민가에서 발견하였습니다. 1998년 하나의 가설이 대두되면서 역사학계가 발칵 뒤집혔는데요.

하단 부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투후의 7대손' 일부 학자들의 해석에 따르면 투후의 7대손이 신라 김 씨 왕조의 시조가 되었다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투후가 도대체 누구일까요? 바로 흉노족의 김일제라는 사람입니다.

가설에 의하면 신라 왕실이 흉노족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김일제는 한나라 무제 때 벼슬을 단 흉노족 휴도왕의 태자인데요. 정리하자면 흉노족이었던 투후 김일제의 7대손이 신라 김 씨 왕조의 시조라는 겁니다. 당시 한나라 한무제는 흉노족의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군을 북방에 보내 흉노를 공격하였습니다. 한나라에 끌려온 흉노족 태자 김일제는 한무제의 신임을 얻고 공을 세우며 한무제에게 '김'이라는 성씨를 하사 받았습니다. 그리고 산둥성 지역에 투후로 책봉이 되었으며, 이후 투후 김일제 후손이 한반도로 내려와 신라땅에 정착하고 신라 김 씨의 왕조를 열었다는 가설입니다.

  • 고대 기계 속 수수께끼

1901년 그리스 안티키테라섬 인근에 바다 밑에서 난파된 것으로 추정되는 선박 한 척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선박에서 고대 그리스 시대의 항아리, 장신구, 조각품 등과 함께 무려 기원전 1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기계를 발견하였는데요. 안티키테라 기계라 불리는 이 장치는 사실 처음 발굴 당시에는 단순한 청동 물체로 여겨졌습니다. "대체 이건 어디에 쓰는 물건이지? 도대체 알 수가 없네." 그런데 70년이 흘러 1971년 영국의 물리학자 데릭 J. 드 솔라 프라이스 교수는 안티키테라 기계를 x-ray와 감마선 이미지로 촬영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 안티키테라 기계의 잔해 속에서 30 개 이상의 톱니바퀴를 발견했습니다. 그 이후에 여러 학자들이 모여 끈질긴 연구를 이어간 끝에 기계에 적힌 설명서 속 그리스어를 해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설명서에는 천체들의 움직임과 위치, 일식 예측 등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었는데요. 설명서대로 기계를 복원한 결과, 기원전 1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안티키테라의 정체는 천문 관측 기계였습니다.

복잡하고 정교한 기계 장치를 기원전 1세기에 만들었다는 점도 놀랍지만,  더욱 놀라운 점은 안티키테라 원판에 새겨진 비율입니다. 태양 주위를 도는 지구의 공전 기간은 약 365.25일, 달이 지구주위를 도는 달의 공전 기간 약 29.5일로 달과 지구가 공전 후 처음 위치로 돌아오는 주기 235개월인데요. 또 하나의 주기는 월식인데, 똑같은 형태의 월식이 반복되는 주기는 223개월입니다. 이것은 놀랍게도 안티키테라 원판 비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현대에 만들었다고 해도 믿을 만큼 뛰어난 기술로 고대에 어떻게 이 장치를 만들었는지는 아직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있습니다.

  • 역사를 뒤흔든 동전

학교 다닐 때 우리는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고 배웠는데요. 그런데 콜럼버스의 발길이 닿기도 전에 아메리카 대륙을 다른 유럽인이 먼저 발견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의 상식을 뒤엎는 미스터리한 이 사실은 한 동전 때문에 세상에 밝혀졌습니다. 1957년 고고학자들이 미국 메인주에서 유물을 발굴하던 중 의문의 동전들을 발견하였는데요. 이후 22년이 흐른 1979년  또 다른 고고학자들이 메인주에서 발견된 동전, 일명 메인 페니를 감정한 결과 이 동전은 11세기 노르웨이 바이킹들이 쓰던 동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콜럼버스보다 무려 약 400년 앞선 11세기 후반, 북유럽의 바이킹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내디뎠다는 증거일 뿐만 아니라 바이킹 부족과 아메리카 원주민이 교류했다는 증거라고 추정했습니다. 지도상 미국 가장 북동쪽에 있는 메인주는 북유럽과 비교적 가까운 곳입니다.

일부 전문가들에 따르면 아메리카 대륙에 콜럼버스보다 바이킹이 먼저 도착했다는 증거를 뒷받침해 주는 또 다른 증거가 있다고 하는데요. 1960년대 캐나다 동부 뉴펀들랜드섬에서 11세기 초반 바이킹들의 유물이 발굴되었다고 합니다. 메인주에서 발견된 메인 페니 역시 11세기 바이킹들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실제 사용했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바이킹이 아메리카를 먼저 발견했다는 사실을 좀 더 뒷받침하는 사유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 동전이 과거 아메리카 대륙에서 바이킹들이 실제로 사용한 동전이 맞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였고, 11세기에 만들어진 동전이 도대체 누가, 어떻게, 왜 아메리카 대륙까지 가져갔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미스터리로 남아있습니다. 콜럼버스보다 먼저 바이킹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면 새로운 역사를 쓰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 고려의 삼별초는 어디로?

1231년 고려를 침략한 몽골, 40년간 이어진 긴 전쟁에 지친 고려는 1270년 몽골에 항복을 선언했는데요. 그런데 이 항복을 받아들일 수 없어 끝까지 대몽 항쟁을 이어간 부대가 있었으니 바로 고려의 최정예 부대 삼별초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여몽 연합군의 엄청난 병력에 밀려 1273년 제주도에서 모두 섬멸되었습니다. 그렇게 삼별초는 최후를 맞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어쩌면 삼별초의 역사는 제주도에서 끝난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아주 의외의 곳에서 삼별초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지난 2007년 일본의 고고학자인 아사토 스스무는 "고려의 삼별초가 류큐 왕국의 건국과정에서 많은 도움을 줬을 것으로 보입니다."라고 충격적인 주장을 내세웠습니다. 류큐는 12세기까지만 해도 수렵·채집 사회였습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농경사회로 발달, 15세기에는 일명 류큐 왕국이 건국됩니다. 배경을 알 수 없는 너무나 갑작스러웠던 류큐 왕국의 출현과 빠른 성장에 많은 역사학자들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고고학자가 류큐 왕국 탄생의 비밀 퍼즐을 바로 삼별초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로는 1994년 오키나와 우라소에시의 성과 왕실의 무덤에서 발견된 암키와, 이 기와에 '계유년 고려와장조'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계유년에 고려 장인이 만든 기와라는 뜻입니다.

앞서 삼별초가 제주도에서 섬멸되었다고 기록되었던 해가 1273년인데요 그 해가 바로 계유년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13세기와 14세기에 연꽃무늬 수막새도 함께 출토되었는데, 오키나와에서 출토된 수막새와 삼별초의 근거지로 삼았던 진도 용장산성에서 출토된 수막새가 너무나 흡사하다는 점입니다. 출토된 유물들을 통해서 삼별초가 제주도를 떠나 류큐왕국 건국에 도움을 줬다는 것을 충분히 의심해 볼 만한 것입니다. 과연 일본 오키나와에 삼별초의 혼이 살아 숨 쉬고 있었던 것일까요?

  • 베트남에서 온 고려의 충신

13세기 고려시대 몽골군들로부터 나라를 지켜낸 혁혁한 공을 세우고 관직까지 올랐지만 어쩌면 우리는 잘 몰랐던 신비로운 한 인물에 대한 미스터리입니다. 이 역사 속 미스터리 인물은 화산 이 씨의 조상인데요, 바로 화산 이 씨의 중시조였던 화산군 이용상입니다.

너무나도 놀라운 그의 정체는 사실 고려인이 아니라 베트남인 이었습니다. 그것도 베트남 최초의 통일왕조였던 리 왕조의 왕자 리롱떵 이었습니다. 고려 시대 1세대 귀화인인 셈입니다. 베트남인이 고려까지 와서 어떻게 화산 이 씨의 중시조가 되고 또 관직에 까지 올랐는지 궁금해하실 텐데요. 지금으로부터 약 800년 전인 1225년, 당시 안남국으로 불리었던 베트남의 쩐 왕조가 왕권을 찬탈하며 리 왕조 일가를 숙청하였습니다. 리 왕조의 왕자 리롱떵은 가까스로 일행들과 배를 타고 송나라로 향하던 중 고려 황해도 옹진반도 지역에 도착한 겁니다. 그리고 리롱떵 일행이 외국인임에도 고려인들에게 배척당하지 않았던 이유는 당시 고려의 상황을 이해하면 쉽게 풀립니다.

당시 고려는 무역항인 벽란도를 통해서 송나라, 대식국 등 다양한 나라와 교류를 했기 때문에 외국인인 리롱떵 일행을 배척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자국민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는데요. 그뿐 아니라 리롱떵 왕자는 한자에 능숙했기 때문에 다행히도 필담을 통해 고려인들과 소통할 수 있었고, 무사히 고려에 정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전 베트남 왕자에서 현 고려인이 된 그가 역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일이 있게 됩니다. 1253년 몽골군이 고려에 침입하자 

마을 수령 그리고 함께 정착한 안남국 사람들과 군대를 편성하여 고려의 장수로서 몽골군에게 맞서 고려 영토를 지켜냈기에 고종은 그의 공을 인정해 그를 화산군으로 책봉했고, 관직과 함께 성씨를 하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리롱떵에서 화산이 씨의 중시조 이용상으로 역사의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그리고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나 약 800년 뒤 1995년 화산 이 씨들의 베트남 방문을 시작으로 2018년에도 응우옌 부뚜 주한 베트남 대사가 경북 영주시의 화산 이 씨 집성촌을 방문하는 등 이용상의 후손들은 베트남과 한국을 오가며 교류하고 있습니다. 

  • 조선판 문 씨 표류기

표류 때문에 벌어진 한 사람의 미스터리한 삶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801년 당시 조선의 제주도에 표류해 온 외국인들이 있었는데요. 그런데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언어를 구사하는지라 이들의 국적을 알 길이 없어 고국으로 돌려보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약 9년 뒤 구세주처럼 등장한 어떤 한 사람이 외국인들과 말을 주고받더니 이들의 국적이 여송, 지금의 필리핀이라는 사실을 알아냈고 덕분에 무사히 고국으로 돌려보낼 수 있었습니다. 조선 최초 필리핀어 통역사의 정체는 전라도 우이도에 사는 한 홍어장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어떻게 필리핀어를 구사했을까요?

1801년 12월 홍어장수 문순득은 풍랑을 만난 뒤 구사일생으로 어딘가에 도착했는데요. 그가 도착한 곳은 필리핀이 아니라 삼별초와 건국에 도움을 줬다는 오키나와의 류큐였습니다. 당시 조선에 사신을 보내며 교류했던 류큐인들은 조선인 문순득을 반기며 극진한 대접을 하였고, 약 8개월간 류큐에서 생활하던 문순득에게 드디어 청나라로 떠나는 사신을 통해 조선으로 돌아갈 길이 열렸습니다. 그런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또 풍랑을 만나서 이번엔 필리핀 여송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약 9개월 동안 쌀 무역을 도우며 여비를 버는 등 다양한 생존력으로 집에 갈 날 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현재 마카오인 오문에서 또 3개월을 보낸 뒤 청나라를 거쳐 무려 3년 2개월 만인 1805년 1월 마침내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문순득의 표류가 특별한 이유는 그가 당시 머물렀던 필리핀은 스페인의 식민지였고,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거류지였습니다. 그는 유럽 문화를 접한 조선 최초의 서민이 된 것입니다. 조선 그 어느 기록에도 없는 생생한 경험을 한 문순득의 이야기는 우이도에 유배 중이던 실학자 정약전이 <표해시말>로 기록해 남겼습니다. 당시 류큐, 여송, 오문 등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나라들의 문화와 생활상, 의복과 선박 구조, 기후뿐 아니라 100여 개의 류큐어, 필리핀어까지 기록하여 높은 학술적 가치가 있다고 평가되었습니다. 뜻하지 않게 난민이 됐지만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이들은 우연에서 시작된 미스터리 역사 속에서 창대한 발자국을 남겼습니다.

  • 역사에서 사라진 천재 과학자

지금까지도 조선시대 최고의 천재 과학자라고 평가받는 장영실역사적으로 위대한 공을 세우며 대호군의 자리에 까지 올랐지만 조선시대 가장 미스터리한 인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그는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 할 기술을 많이 선보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472년 동안 왕의 주변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을 세세하게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장영실의 미스터리를 살펴보겠습니다. 1433년 세종시 15년 9월 16일 세종실록에 따르면 장영실은 "그 아비가 본래 원나라의 소주, 항주 사람이고 어미는 기생이었는데 공교한 솜씨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보호하시었고 나도 역시 이를 아낀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장영실이 조선신분 계층 중에 가장 천한 노비였기 때문에 그 출생일과 성장과정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수많은 업적과 공을 세운 그가 1442년 이후 조선왕조실록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는데요. 그 결정적인 이유는 1442년 3월 16일 자 세종실록을 살펴보면 "대호군 장영실이 안여 만드는 것을 감독하였는데 견실하지 못하여 허물어졌으므로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금부에서 장영실에게 곤장 100대를 집행했다고 전해졌는데 놀랍게도 이 내용이 조선왕조실록에 담긴 그에 대한 마지막 기록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미스터리한 사실은 장영실과 함께 안여 제작을 책임졌던 문신 조순생에 대해서는 아무런 처벌을 내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종이 장영실을 파면한 것에 대해 사람들은 당시 천문관측은 오직 중국 명나라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세종이 장영실이 건립한 왕립 천문대인 간의대로 인해서 명나라와의 외교 문제로 비화할까 봐 그를 파면시켰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결론

"궁금증의 시작 - 그날의 역사 미스터리"에 대한 주제로 글을 써보았는데요, 아직도 해명되지 않은 미스터리한 사건들은 우리의 상상력과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이 같은 사건들은 아직까지 해답이 없으며, 계속해서 연구와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미스터리한 사건들은 역사의 희미한 퍼즐 조각들로 남아있고, 우리는 그들을 통해 과거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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